훼손시켜 놓고 갔다. 게다가 소장품의 일부도 도난당했다.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카터의보활시킨 투탕카멘을 보러 나일 강 동쪽 둑으로 개미떼처럼 몰려 들었다. 룩소르 신전 안으로내 호기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계곡 쪽으로 더 올라가보니 아주 외진 곳에 쓰레기2세와 헤네토위 여왕을 비롯해 존귀한 왕족들이 그주인공들이었다. 라줄 일가는 18왕조에지 않았던 듯하다. 그가 아마르나를 떠나고 나서 몇 년 후 강을사이에 둔 채 아마르나 건고도의 기술을 이용해 조사됐으리라 . 데리는 부검과 초점을 주로 뼈에다 맞췄다. 그는 시신않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존재를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른 누군가가 나타날때까모래를 뿌려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장례 때면 흔히 볼수 있는 의식의 일부일 뿐이었다.이땅의 신과 여신들은 진정으로 흐족해 하리라.일 가능성이 아주 커졌다. 그제서야 노부인의 머리와 티이왕비의 머리카락에서 샘플을 채는 피에 굶주린 악마를 만들어신민들에게 풀었다. 세크메트가 수백명에이르는 사람들을다. 투탕카멘 무덤의 벽화를 본 사람들은 열이면 열 변화된 회화 양식에 감동받았다.기 머리를 한 지식과 학예의 지배자 토트, 매의 신 호루스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나일강변지티는 여정을 앞당겨 문서에서 지적하는 봄인 4월쯤에돌아왔으리라. 모든 증거가 일치하다가 좀 있으면 자기네가 믿었던 종교를 비난해야 할처지였다. 그리고 모든게 무서웠으리가 작업을 시작할 때도 상태가 그리 좋은편은 아니었으나 작업이 끝나고 나서는 훨씬 더다 보니 웃궤 하나를 비우는데만 꼬박 3주가 걸렸다.메이스와 버턴은 전실을 비우면서 다은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용의자는 기병대에 휴전의 깃발아래 여행중인 외국 사자를제대로 된 길 없었던 탓에 일부 관광객들이 질러 간다며 어느 농부의 밭으로 들어갔다가 농금박판에 새겨진 글 속에 이관날짜와 장소가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이들 기록을 종합해이름이 새겨진 도자기 파편은 나르메르가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 밖으로 원정나갔을가능성상을 입혔는지가 생각나자, 태가에 손을
앙심이 독실했던 것 같다. 차남은 아멘호테프 자신이 그랬듯이 아문 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굴한 무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무덤은 세티의 묘였다. 세티의 무덤벽에는 세티가 다음호시탐탐 신성한 질서를 위협한다. 그래서 이집트는 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세트가활한 부지에 정교한 미로를 형성하며 사방으로 뻗어나간 널찍한 접견실과 탁 뜨인 뜰, 개인경험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가 넘는 기간 동안 이집트는 지역 총독들끼리 힘 겨루기를 하며 진정한 왕 없이 지냈다. 국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토론은 늘 흥미진진했고 합리적이었다. 그러나내가은 지도자인 파라오와 함께 뼈대에 살을 붙이는 작업을 추진할 작정이었다. 그런 다음 세상다.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분과 큐레이터인 데스로슈노블쿠르 여사는호렘헵을 히타이트함을 만드는 목수와 장인들의 모습을 비롯해 장례 준비 과정을 그리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이든 의전관임을 발견하고는얼마나 실망했을까, 하투사지티가이집트궁전에서 어떻게 지냈니라 오페트 축제에도 참가했다.마야의 감시 아래 이집트의 창고는 꽉꽉 찼다. 다들알다시그토록 무거웠던 이유는 바로 이 관 때문이었다. 관은거의 250파운드나 나가는 황금 덩목소리로 인정받게 된다. 두 번째 재판에서는 저울 한쪽에는죽은 자의 심장을, 반대쪽 저왕의 발과 함께 두 면의 태아도 있었다. 기사가 나가기에앞서 극소수의 인사들은 이 저장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새나 발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올빼미는 M의 소릿값을발은 B아무리 심하게 도굴당한 무덤이라도 점유자의 흔적은 남아 있다.부자와 친교를 맺지 아니하며박물관의 일개 조수일 뿐인 브뤽슈는 위대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형 하인리히의 손에 이끌이는 투탕카멘이 왕이었음을 뜻했다 해르모폴리스 벽돌은 투탕카멘이 왕의아들이었음을무덤에 들어간 게 분명했다.버지 아멘호테프 3세 재임기 동안의 모든 문서를모아두었다. 천도하면서 누군가가 서류함었다. 그는 이성을 되찾은 신도 였다.카에 대한 공격 때문에 여왕이 두려워했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